신라의 민정 문서
서원경(청주) 부근 사해점촌 및 4개 촌락에 대한 문서로 당시 촌락의 경제 상황과 조세 제도 운영을 잘 보여 주는 자료이다. 1933년 일본 도다이사(동대사) 쇼소인(정창원)에서 발견되었으며,"신라 장적"이라고도 한다.
토지는 논, 밭 촌주위답, 내시령답 등 토지의 종류와 면적을 기록하고, 사람들은 인구, 가호, 노비의 수와 3년 동안의 사망, 이동 등 변동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 밖에 소와 말의 수, 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의 수까지 기록하였다.
이 고을의 사해점촌을 조사해 보았는데, 마을 크기는 5,725보, 공연 수(孔烟數, 호수)는 합하여 11호이다. 이 가운데 중하연(中下烟)이 4호, 하상연(下上烟)이 2호, 하하연(下下烟)이 5호이다. 마을의 모든 사람을 합치면 147명이며, 이 가운데 전부터 계속 살아온 사람과 3년간 태어난 자를 합하면 145명이 된다. 정(丁)이 29명(노비1명 포함), 조자(助字) 7명(노비1명 포함), 추자(追子) 12명, 소자(小子) 10명, 3년간 태어난 소자 5명, 제공(際公)은 1명이다. 여자의 경우 정녀(丁女) 42명(노비 5명 포함)…말은 22마리에 3년간 3마리가, 소는 17마리에 5마리가 각각 늘어났다. 논은 102결 정도인데, 관모답이 4결, 내시령답 4결, 촌민이 받은 것(연수유전답)이 94결 2부 4속이며, 그 중 촌주가 그 직위로서 받은 논이 19결 70부이다. 밭은 62결, 마전은 1결이다. 뽕나무는 914그루가 있었고, 90그루를 새로 심었다. 잣나무는 86그루가 있었고, 34그루를 심었다. 호두나무는 74그루가 있었고, 38그루를 심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