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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상담 및 가족치료 요약

가족 상담 및 가족 치료 [ 경험적 가족 치료 1 : 주요 인물 ]

by 성공멘탈충전소 2022.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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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적 가족 치료 1

 

주요인물

 

휘태커 ( Carl Whitaker )

 

뉴욕 북부지방의 고립된 낙농 농장에서 자란 휘태커는 의대 졸업 후 수련생활을 마쳤으며, 2차 세계대전 동안 군에 소집되어 정신과 공동치료팀에서 일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정신 치료에 관심을 가진다.

전쟁 후 에모리 의과대학에 정신과를 세웠고, 1955년 애틀랜타 정신 진료소를 설립하여 많은 정신분열증 환자를 치료하면서, 병의 원인에 가족이 중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초기 입장을 확장시켜 심리 내적 딜레마와 대인관계에서의 딜레마를 중심으로 정신분열증을 개념화하고 가족을 치료에 참여시키는 과정에서 ‘상징적 경험주의 가족치료’가 탄생하게 되었다.

치료자 자신을 활용한 가족과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만남을 중시하였고, 치료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과 치료자를 포함한 모든 참여자의 느낌과 경험, 그리고 생각을 공유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1965년 위스콘신(Wisconsin) 의과대학에서 근무하였고 메디슨에서 개업하였으며, 1995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티어 ( Virginia Satir )

 

교육학을 전공한 그녀는 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200여 학생의 가정방문이 계기가 되어 가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시카고 대학원에서 사회사업을 전공한 후, 1951년 자신의 가족치료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가족을 치료했다.

1955년 애틀랜타 정신 진료소를 설립하여, 그곳에서 많은 정신분열증 환자를 만나면서 정신분열증 환자 가족에 대한 연구했다.

1959년 Don Jackson을 도와 MRI(정신건강연구소)를 설립하여 최초로 가족치료 프로그램을 고안하고 지도하였으며, 1966년 MRI를 떠난 후 에살렌 연구소의 지도자가 되어 성장 기법의 개발에 관심을 가졌다.

사티어는 전형적인 양육적 치료자로서, 오랜 임상적 경험을 기초로 발견하게 된 내담자의 역기능적 특성들에 대해 인간적이고 따뜻하며 일치된 마음으로 치료했다.

1988년 사망 후 그녀의 동료와 제자들은 사티어의 경험적 가족치료를 계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갔고, 최근에는 사티어의 제자이면서 계승자로 알려진 반맨(John Banmen)이 단기간 내에 내담자의 내적 과정을 체계적으로 탐색하고 내담자의 지금-여기 경험을 통해 변형을 가져오는 ‘체계적 단기경험치료 모델’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월터 켐플러(Walter Kempler)

 

월터 켐플러는 펄스(Friz Perls)로부터 게슈탈트 치료를 훈련받은 경험을 가족치료에 접목하려고 했다.

- 게슈탈트 치료 기법들을 도입한 그의 가족치료 접근법을 ‘형태경험적 가족치료’라고 했다.

 

켐플러는 치료자로 하여금 가족과 평등하게 치료의 참여자로서 가족들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을 강조하고, 치료자와 내담자 간의 상호 만남, 상호작용이 치료 과정이라고 봤다.

- 가족 구성원에게도 참여와 자기개방을 기본적인 행동 원칙으로 제시하여 가족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지금-여기를 강조하며 오직 현재만이 변화될 수 있다고 봤다.

 

 

프레드 덜과 바니 덜, 데이비드 켄터(Fred Duhl & Bunny Duhl, David Kantor)

 

프레드 덜과 바니 덜은 많은 표현적 기법(역할극, 가족 인형극, 공간화하기, 조각 기법 등)을 경험적 가족치료에 도입했다.

- 이들이 경험적 가족치료에 속하는 이유는 그들의 개념이나 작업 때문이라기보다 치료기법의 도입과 사용에 공헌했기 때문이다.

 

1969년에 프레드 덜과 함께 보스턴 가족연구소(Boston Family Institute)를 창설한 켄터는 인간관계에서 공간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인간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은유로 공간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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