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의 정책
나주 완사천 설화
-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전 나주에 10년간 머무르게 되었는데, 어느 날 진 위쪽 산 아래에 다섯 가지 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있어 가보니 샘에서 아리따운 여인이 빨래를 하고 있어 그가 물 한 그릇을 청하자, 여인이 버들잎을 띄워 주었는데, 급히 물을 마시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여인의 총명함과 미모에 끌려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분이 장화왕후 오씨 부인이고, 그분의 모에서 태어난 아들 무가 혜종이 되었다.
서경 개척
- 태조는 신하들에게 "평양의 옛 도읍이 황폐해진 지 오래되어 잡초가 우거지고 여진인의 사냥터로 변해 버렸다. 백성을 이주시켜 국경을 튼튼하게 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호족 통합 정책 - 사심관, 기인제도, 사성정책
- 태조 18년 신라왕 김부(경순왕)가 항복해 오니 신라국을 없애고 경주라 하였다. 김부로 하여금 경주의 사심이 되어 부호장 이하의 (임명을) 맡게 하였다. 이에 여러 공신이 이를 본받아 각기 자기 출신 지역의 사심이 되었다. 사심관은 여기에서 비롯 되었다.
- 건국 초에 향리의 자제를 뽑아 서울에 볼모로 삼고, 또한 출신지의 일에 대하여 자문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이를 기인이라 한다.
- 김순식은 강원도 명주 사람이다. 그는 그 고을의 장군으로 오랫동안 굴복하지 않아 태조가 걱정하였다. 시랑 벼슬을 하는 권열이 " 아버지가 아들에게 명령하고 형이 아우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은 당연한 세상 이치입니다. 순식의 아버지 허월이 지금 중이 되어 내원에 있으니, 그를 파견 하여 회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건의 하였다. 순식이 큰아들 수원을 보내 항복하자, 태조는 그에게 왕씨 성을 주고 땅과 집을 주었다.
태조 왕건의 훈요 10조
내가 듣건대 대순은 역산에서 밭을 갈다가 마침내 요의 선위를 받았고, 한나라 고제는 패택에서 일어나 드디어 한나라 제업을 일으켰다. 나 또한 가난하고 평범한 집안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잘못 추대되어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괴롭힌 지 19년 만에 삼한을 통일하였고, 외람되이 왕위에 있은 지 25년이니 이 몸은 이제 늙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후사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욕심을 부려 기강을 무너뜨릴까 크게 근심스럽다. 이에 이것을 지어 후대의 왕들에 전하고자 하니, 바라건대 아침저녁으로 펼쳐 보아 귀감으로 삼을지어다.
1조 : 우리나라가 대업을 이룬 것은 부처가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뒷날 간신이 정치를 하면 승려들이 청탁을 하여 사원 쟁탈이 일어날 것이다. 이를 금지하라.
2조 : 모든 사원은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가려 개창한 것이다. 신라 말 사원을 함부로 지어 나라가 망하였다.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3조 : 왕위 계승은 적자적손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불초 할 때에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잇게 한다.
4조 : 중국 제도와 풍속을 배워야 하지만 반드시 똑같게 할 필요가 없다. 거란은 짐승 같은 나라이다. 본받지 마라.
5조 : 서경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며 만대에 전할 땅이다. 반드시 3달마다 가서 100일 이상 머물도록 하라.
6조 : 연등은 부처를 모시는 것이고, 팔관은 하늘. 산. 강을 섬기는 것이다. 두 행사를 줄이지 마라.
7조 : 왕이 된 자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민심을 얻고록 하라.
8조 : 차령산맥과 금강 이남은 산천과 인심이 배역을 끼고 있으므로 그 지방사람을 등용하지 마라.
9조 : 모든 제후와 여러 관료의 녹은 나라의 크고 작음에 견주어 이미 정제를 삼았으니, 늘리거나 줄이지 마라.
10조 : 국가를 가진 자는 항상 무사한 때를 경계할 것이며, 널리 경사를 섭렵해 과거의 예를 거울로 삼아 현실을 경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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