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정치 - 백제
정사암 회의 : 호암사에 정사암이란 바위가 있다. 국가에서 재상을 뽑을 때 후보자 3 ~ 4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어 바위 위에 두었다.
고이왕
내신좌평을 두어 왕명 출납을, 내두좌평은 물자와 창고를, 내법좌평은 예법과 의식을, 위사좌평은 숙위 병사를, 조정좌평은 형벌과 송사를, 병관좌평은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각각 맡게하였다.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한 군현과 대립하였다.
근초고왕
백제왕이 병력 3만 명을 거느라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이 출병하여 막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서거하였다.
아직기가 일본에 건너가서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다.
박사 고흥을 얻어 비로소 ‘서기’를 갖게 되었다.
침류왕
왕이 즉위한 갑신년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오니, 그를 맞이하여 궁중에 두고 예로써 공경했다. 이듬해 을유에 한산주에 절을 짓고 승려 10명을 두었으니 이것이 백제 불법의 시초이다.
문주왕
고구려를 피해 남쪽 금강 유역의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동성왕
동성왕은 신라에 사신에 보내 혼인을 청하였는데, 신라의 왕이 이벌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다. 결혼 동맹을 선택한 것으로 분석된다.
무령왕
1971년 7월,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공사 도중 벽돌무덤 하나가 우현히 발견되었다. 무덥 입구를 열자, 무덤 주인을 알려 주는 지석이 놓여 있었으며, 백제는 물론 중국의 남조와 왜에서 만들어진 갖가지 유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영동대장군인 백제 사마왕은 62세가 되는 계모년 5월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8월 갑신일인 12에 안장하여 대묘에 모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모두 22담로가 있는데, 왕실 자제들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성왕
봄에 사비로 서울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
백제의 왕이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왕 30년, 달솔 노리사치계를 왜에 보내 석가여래상과 불경을 전했다.
무왕
우리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을 따님으로,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원하오니, 우리 대왕의 수명을 산악과 같이 견고하게 하시고 치세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게 하소서.
의자왕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이 처차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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