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고왕(대조영, 천통)
- 그 추장 대조영에 이르러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스스로 진단이라고 하였다. 선천 연간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 일컬었다.
- 신라에 이렇게 말하였다. “고구려 출신의 옛 장수 조영의 성은 대 씨이다. 그는 남은 군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 상고하건대 발해는 바로 말갈의 별종이다.
-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고구려가 망하자, 그는 그 무리를 이끌고 영주로 이사하였다. 그는 무리를 이끌고 동쪽 계루의 옛 땅으로 들어가 동모산을 거점으로 하여 성을 쌓고 거주하였다. 그는 용맹하며 병사 다루기를 잘하였으며, 말갈의 무리와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점차 그에게 들어왔다.
무왕(대무예, 인안)
- 왕이 신하들을 모두 다 불렀을 때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흑수가 처음에는 우리에게 길을 빌려서 당과 통했습니다. 지금 당나라에 관직을 청하면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이것은 반드시 당과 더불어 꾀를 내서 위를 배반하여 우리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은 그의 아우 대문예와 외숙 아아상을 시켜서 군대를 내어 흑수를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 왕이 아룁니다. 산하가 다른 곳이고, 국토가 같지 않지만 어렴풋이 풍교 도덕을 듣고 우러르는 마음이 더할 뿐입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대왕은 천제의 명을 받아 일본의 기틀을 연 이후 대대로 명군의 자리를 이어 자손이 번성하였습니다. 발해왕은 황송스럽게도 대국을 맡아 외람되게 여러 번을 함부로 총괄하며,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멀어 길이 막히고 끊어졌습니다. 어진 이와 가까이하며 우호를 맺고 옛날의 예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어 이웃을 찾는 것이 오늘에야 비롯하게 되었습니다.
- 국서에서 말하기를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잇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선린을 도모하고자 일본에 사신으로 영원장군 낭장 고인의 외 24인을 보내 외교 문서를 전하고, 아울러 담비 가죽 300장을 보냈습니다.
- 무예가 장수 장문휴를 파견하여 해적을 거느리고 등주자사를 치니, 현종은 급히 문예를 파견하여 유주의 군사를 동원 시켜 이를 공격하는 한편, 태복경 김사란을 사신으로 신라에 보내어 군사를 독촉하여 발해의 남부를 치게 했다.
문왕(대흠무, 대흥)
- 흠무가 왕위에 올라 연호를 대흥으로 고치니, 왕 및 도독을 세습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당대종은 조서를 내려 발해를 나라로 인정하여 흠무를 왕으로 삼았다.
- 천황이 삼가 고려국왕에게 문안을 드립니다. 보내 주신 물품은 숫자대로 잘 받았습니다. 돌가는 사신 편에 토산품 등을 보내니 비록 물건이 가볍고 적고 보잘 것 없으나 좋게 생각하셔서 받아주길 바랍니다.
- 지금 보내온 국서를 살펴보니 부왕의 도를 갑자기 바꾸어 날짜 아래에 관품을 쓰지 않았고, 글 끝에 천손이라는 참람된 칭호를 쓰니 법도에 어긋납니다. 왕의 본래의 뜻이 어찌 이러하겠습니까. 지금 대씨는 일없이 고의로 망령되이 사위와 장인을 칭하였으니 벌례를 잃은 것입니다.
선왕(대인수, 건흥)
대명충이 이 나라의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죽으니, 그의 종부인 인수가 왕위에 올라 연호를 건흥이라고 하였다. 처음에 그 나라의 왕이 자주 학생들을 경사의 태학에 보내어 고금의 제도를 배우고 익혀 가더니, 드디어 해동성국( 바다 동쪽의 성대한 나라 )이 되었다. 국토는 5경 15부 62주이다.
남북국 시대
옛날에는 고씨가 북에서 고구려를, 부여씨가 서남에서 백제를, 박 석 김씨가 동남에 신라를 각각 세웠으니, 이것이 삼국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삼국사가 있어야 할 것인데, 고려가 편찬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러나 부여씨와 고씨가 멸망한 다음에 김씨의 신라가 남에있고, 대씨의 나라가 북에 있으니 이것이 남북국이다, 여기에는 마땅히 남북사가 있어야 할 터인데, 고려가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쟁장 사건
왕자 대봉예가 당 조정에 문서를 올려, 발해가 신라보다 윗자리에 자리 잡기를 청하였다. 이에 대해 대답하기를 “ 국명의 선후는 원래 강약에 따라 일컫는 것이 아닌데, 조정 제도의 등급과 위엄을 지금 어찌 나라의 성하고 쇠한 것으로 인해 바꿀 수 있겠는가? 마땅히 이전대로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등제 서열 사건
빈공과의 발해 합격자 성적을 신라 합격자보다 올려달라고 하였다가 거절당한 사건으로 최언위와 오광찬의 빈공과 순위 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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