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골품제
- 선덕 여왕의 이름은 덕만이다. 아버지는 진평왕이며 어머니는 마야 부인 김씨이다. 성골 남자가 없어진 까닭에 여왕이 즉위한 것이다. 진덕 여왕 대까지를 중고(中古)라 하며 (왕의 신분은) 성골이다. 이후는 하고(下古)라 하는데 (왕의 신분은) 진골이다.
- 성주산파를 처음 연 낭혜는 속성이 김씨로 무열왕이 8대조이다. 조부 주천은 골품이 진골이고 위가 대아찬이었으며, 고조와 증조가 모두 장수와 재상을 지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안다. 그러나 아버지 범청은 진골에서 강등되어 득난이 되었다. 이는 귀성의 얻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니, 문부에도 ‘혹 구하기는 쉬워도 얻기는 어렵다’ 고 한 대목이 있다.
- 4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는 방의 길이와 너비가 15척을 넘지 못한다. 느릅나무를 쓰지 못하고, 우물 천장을 만들지 못하며, 당기와를 덮지 못하고, 짐승 머리 모양의 지붕 장식이나 높은 처마 등을 두지 못하며, 금·은이나 구리 등으로 장식하지 못한다. 섬돌로는 산의 돌을 쓰지 못한다. 담장은 6척을 넘지 못하고, 또 보를 가설하지 않으며 석회를 칠하지 못한다. 대문과 사방문을 만들지 못하고 마구간에는 말 2마리를 둘 수 있다.
* 관등에 따라 생활 규제
- 태종대왕(太宗大王)이 즉위하자 당의 사신이 와서 조서를 전했는데, 그 가운데 해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왕이 그를 불러 물으니, 그가 왕 앞에서 한번 보고는 설명하고 해석하는데 의심스럽거나 막히는 데가 없었다. 왕이 놀랍고도 기뻐 서로 만남이 늦은 것을 한탄하고 그의 성명을 물었다. 그가 대답하여 아뢰었다.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이며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경의 두골을 보니 강수 선생이라고 부를 만하다.” 왕은 그에게 당 황제의 조서에 감사하는 회신의 표를 짓게 하였다. 문장이 세련되고 뜻이 깊었으므로, 왕이 더욱 그를 기특히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고만 하였다.
* 강수 선생 : 6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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